일자리가 사라진다. 글로벌 저성장 기조와 기술의 발달은 우리 모두를 일자리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평생직장의 시대는 오래 전 끝났고, 100세시대 누구나 2~3번의 일(業)을 해야 생존한다. 국가도 사회도 답해줄 수 없는 문제, 결국 개인이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내 일은 내가 만들어가야 하는 시대다. 직장을 다니면서, 또는 홀로서기를 통해 '1인기업'을 운영해온 이들에게서 답을 찾고자 한다. '직장 다닌다고 직업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찍 간파한 '1인기업가'들의 경험담을 통해 해법을 찾아본다. [편집자말] [편집자말] |
▲ 유튜브 빨강도깨비 채널을 운영하는 영화 콘텐츠 크리에이터 김학씨. | |
ⓒ 김학 |
11년간 건설회사에서 해외영업을 담당했다. 해외 프로젝트 사업성 평가를 위해 중동지역으로 출장을 자주 갔다. 술을 즐기지 않았기에 출장 기간 틈나는 대로 영화를 봤다. 단조로운 일상을 달래기 위해 영화에 관한 글과 사진을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고 2015년엔 영상 제작까지 뛰어들어 나이 마흔의 유튜버로 변신했다. 유튜브 구독자 20만 명, 누적 조회수 3500만 명의 영화 콘텐츠 크리에이터 빨강도깨비 김학(41)씨 이야기다.
"2015년 4월 <어벤저스:에이지 오브 울트론> 개봉 즈음에 A4용지 10장 분량의 콘텐츠를 준비했어요. 이전 작품들의 세계관과 비교 분석해서 나름 공들인 콘텐츠인데 제가 봐도 너무 길고 재미가 없는 거예요. 그때 유튜브에서 해외 영화 크리에이터의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표현하고 싶은 모든 것을 압축적으로 담았더라고요. 그날로 밤새 영상편집을 배워 한 달도 안 돼 첫 영상을 올렸어요."
한 달 만에 10만뷰 영상 3개 나와... 사표 내고 유튜브 세계 선수로
영화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에 등장하는 자동차들의 뒷얘기를 다룬 첫 영상은 사실 별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운 좋게도 두 번째 영상을 업로드한 후 소위 대박이 났다. '가장 빠른 캐릭터 베스트3'를 소개한 영상인데 한 달 동안 반응이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하루 조회 수가 1000~2000클릭씩 올라가더니 단박에 10만뷰가 넘어버린 것이다.
비슷한 '베스트 시리즈'를 잇달아 제작했고 두 달 만에 10만뷰가 넘는 영상이 3개가 나왔다. 이 '사건'은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진지하게 자신의 콘텐츠에 대한 사업성을 평가했고 성공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2015년 7월 사표를 던지고 유튜브 세계에서 직접 선수로 뛰기로 결심했다.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은 자신이 운영하는 채널의 구독자들이 영상광고를 볼 때마다 수익이 생긴다. 채널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구독자 수가 많을수록, 동영상 조회 수가 많을수록 수익도 커진다. 퇴사 전 두 달 동안 집중적으로 운영해 본 결과 당장의 수입은 물론 최소 3년 후 수입도 가늠이 됐다.
"만 1년이 지났는데 수입은 아직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등락이 심한 편이라 월급보다 많이 들어온 달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달도 있습니다. 원래 목표는 3년 안에 직장 다닐 때 받던 연봉을 달성하는 것인데 최근에 목표를 상향조정 했습니다. 대출도 갚아야 하니까요."
1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해오던 남자가 회사를 그만두고 10대들의 소통 플랫폼인 유튜브에 뛰어들었다는 점은 여전히 의아하다. 김씨 스스로도 1년 전만 해도 온라인 미디어나 유튜브엔 전혀 관심 없이 살아온 평범한 40대 남자라고 말한다.
대학 시절 광고에 관심... "블로그도 영상도, 내 콘텐츠 만들고 싶은 욕구"
▲ 빨강도깨비 김씨의 일은 일주일 단위로 이뤄진다. 아이템을 정한 후 자료조사와 적합한 영화 장면을 찾아내는 과정이 일의 절반이다. 이후 영화 장면을 보면서 스크립트를 작성하고 녹음 후 그 위에 영상을 편집한다. | |
ⓒ 김학 |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대학 시절 광고에 관심이 있었어요. 졸업을 앞두고 친구들이 취업준비를 할 때 광고학원을 다니고 소규모 광고회사에서 1년 정도 일한 적도 있었어요. 어쩔 수 없이 회사에 들어가서 제가 원하는 것과 상관없는 일을 해왔지만 나만의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욕구는 그때부터 있었던 것 같아요. 블로그를 시작한 것도 영상을 만드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제가 좋아서 해왔던 일이죠. "
김씨는 최근 영화 콘텐츠의 출발점이 됐던 블로그를 폐쇄했다. 영상을 시작하며 관리가 힘들어 1년 넘게 방치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똑같은 콘텐츠를 글로 쓰는 것보다 영상으로 만들 때 만족도는 훨씬 높아요. 이제는 글로 뭔가를 만드는 것 자체가 부담감으로 다가와요. 물론 영상은 편집 등 따로 후반 작업을 해야 하지만 지금은 작업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서 오히려 글을 쓰는 것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김씨의 일은 일주일 단위로 이뤄진다. 아이템을 정한 후 자료조사와 적합한 영화 장면을 찾아내는 과정이 일의 절반이다. 이후 영화 장면을 보면서 스크립트를 작성하고 녹음 후 그 위에 영상을 편집한다. 편집은 하루 12시간씩 이틀 꼬박 작업해야 한다. 자막과 효과를 넣은 후 지인에게 미리 보여주고 오타 등 수정작업을 하면 한 편의 동영상이 완성된다. 최근엔 노하우가 늘어 하나의 아이템으로 2~3개의 영상을 제작하기도 한다.
"사실 거창한 목표는 없습니다. 1인기업이니 일단은 제가 잘 먹고 잘살아야겠죠. 1인기업 체제로도 충분히 생계를 이어가고 삶의 질이 확보된다면 꼭 큰 기업으로 성장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10년 동안 조직의 비효율성을 겪었기 때문에 조직이 커진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월요일이나 화요일 아침에 혼자 영화를 보기도 하고 업무시간 배분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점은 1인미디어의 큰 장점이다. 하지만 자유에 따른 책임은 전적으로 스스로가 져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콘텐츠의 반응이 안 좋으면 스트레스가 크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그중 하나다.
"극복 방법은 계속해나가는 것뿐입니다. 유튜브 영상은 언제 어떤 게 뜰지 아무도 모릅니다. 난다 긴다 하는 크리에이터들을 만나 봐도 다들 진짜 모르겠다고 해요. 그런 이유에서 크리에이터로서 가져야 할 덕목 중 하나는 꾸준함입니다. '1인 미디어 특성상 분명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있는데 보통 젊은 친구들은 그런 시기가 조금만 길어지면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포기해버리는 것 같아요. 어떤 일이 있어도 최소 1년 이상은 꾸준히 영상을 올려보겠다는 각오로 시작해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크리에이터 자신이 좋아하는 콘텐츠 만들어라"
▲ 유튜브 영화 콘텐츠 크리에이터 빨강도깨비 김학씨. | |
ⓒ 김학 |
'영화'라는 범주 안에서 사람들이 선호하는 콘텐츠를 찾아나가는 과정에 있지만, 김씨는 스스로 자신만의 콘셉트와 지향점이 있는 콘텐츠 크리에이터라는 자부심이 있다. 중간에 막힘없이 술술 보게 되는 기승전결에 따른 완성도와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특유의 편집이 언젠가는 인정받는 날이 올 것이라 확신한다.
"대부분의 영화 유튜버들이 슈퍼히어로 장르인 마블 영화로 재미를 봤죠. 신작 영화가 나올 때마다 조회율도 높고 세계관 등 관심이 많아서 뭘 만들어도 조회 수가 높습니다. 올해 개봉한 <캡틴 아메리카: 시빌워>의 경우 신생 채널에서 만든 영상도 100만 뷰를 훌쩍 넘었습니다. 저도 처음엔 대중들이 슈퍼히어로 장르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만들었는데 의외로 제 채널에서는 그런 영상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최근에 깨달았어요. 그동안 슈퍼히어로 장르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었는데 이제는 자유로워졌습니다. 제가 하고 싶으면 하겠지만 굳이 조회수나 흥행 때문에 억지로 하진 않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1인미디어,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되고자 하는 이들을 향해 김씨는 '남이 좋아할 것 같은' 콘텐츠가 아닌 '크리에이터 자신이 좋아하는' 콘텐츠를 만들기를 당부했다.
"콘텐츠라는 게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입맛이 다 다르므로 하나로 정리할 수 없죠. 1인미디어는 누가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그 하나를 찾아서 그것을 좋아할 사람들을 모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콘텐츠 크리에이터로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들어서 보여드리는 것이 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청자들은 댓글로 소통하죠. 최근 만든 영상 '영화 속의 활'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국궁의 역사부터 백과사전 수준의 댓글들이 1000개가 넘게 달린 걸 봤습니다. 제 영상을 계기로 사람들이 자신의 지식을 토로하는 장이 된 것이죠. 그걸 보면서 제가 꼭 답을 내놓을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영상으로 된 흥미로운 장난감을 만들어 놓으면 갖고 그걸 노는 건 시청자들이 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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