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를 이끌었던 주요 산업이 대부분 늪에 빠졌다. 수출을 주도했던 품목들이다. 특히 위험한 다섯 가지를, 정부는 5대 취약업종이라고 부른다. 해운, 조선, 철강, 석유화학, 건설이다.
가장 심각한 게 해운이다. 현대상선은 현재 주식 거래 정지 상태다. 한진해운은 25일 채권단공동관리(자율협약) 신청서를 제출했다. 양대 해운사가 모두 경영권을 내놓은 상태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우선 구조적인 문제가 크다. 그 속에서 국내 해운업체는 '상투'를 잡았다. 아울러 정부와 경영진의 무책임, 무능을 이유로 꼽을 수 있다.
해운업은 배를 빌려주고 수수료(운임)를 받는 사업이다. 무역이 활발해야 돈을 번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지금껏, 세계 경기가 확 살아나는 기미는 없다. 설령 앞으로 세계 경기가 살아난다고 해도, 해운업이 얼마나 혜택을 볼지는 모호하다. 미국 등 주요 선진국은 제조업의 '리쇼어링(reshoring)'을 추진한다. 해외로 나가 있던 공장을 국내로 불러들인다는 뜻이다. 배에 부품을 싣고, 조립 공장으로 보낸 뒤, 완제품을 다시 선진국 시장에 배로 실어 나르는 구조가 무너지고 있다. 배를 이용할 일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3D프린터' 활용 증가 역시 길게 보면 악재다. 부품과 반제품을 이리저리 옮겨야 할 필요 자체가 감소하고 있다.
너무 비싼 용선료, '상투' 잡았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용선료' 문제가 있다. 이게 핵심이다. 해운업체가 빌려주는 배는 크게 두 종류다. 자기 배, 아니면 남에게 빌린 배다.
후자가 더 많다. 은행업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은행 역시 남에게 빌린 돈을 다시 빌려주고 차액을 남긴다. 은행은 단기로 돈을 빌려와서 장기로 빌려주는 반면, 해운업체는 장기로 배를 빌려와서 단기로 빌려준다는 점이 다르다. 단기 금리가 급등하면, 은행이 위험해진다. 해운산업도 마찬가지다. 해운업체가 선주(배를 갖고 있는 회사)에게서 배를 빌리는 비용을 용선료라고 한다. 그게 너무 비싸면, 해운업체가 망한다. 지금이 딱 그렇다.
현대상선은 지난해 매출 5조7000억 원 중 2조 원을 용선료로 썼다. 매출 가운데 3분의 1을 웃도는 규모다. 한진해운도 지난해 매출 7조7000억 원 중 약 1조 원을 용선료로 냈다. 올해도 약 9288억 원을 용선료로 내야 하는 한진해운은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지불해야 할 용선료가 총 2조998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용선료가 비싼 데는 이유가 있다. 이들 해운업체가 선사와 용선 계약을 맺은 시점이 2008년 금융위기 전이었다. 금융위기가 올 줄 몰랐을 때이므로, 용선 수요가 컸다. 당연히 용선료도 높았다. 선주들은 장기계약을 하면 용선료를 깎아준다고 했다. 국내 해운업체들은 장기계약을 맺었다.
금융위기 이후 물동량이 확 줄었다. 운임도 떨어졌다. 하지만 장기계약 용선료는, 금융위기 전 수준 그대로다. 국내 해운업체는 세계 무역이 활발하던 시기 용선료 '상투'를 잡은 꼴이 됐다. 높은 용선료를 내면서 빌린 배를, 낮은 운임에 화주에게 빌려주는 사업. 오래 버티기 힘든 게 당연하다.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해운업체들은 오는 5월께 선주들과 용선료 재협상을 시도할 계획이다. 해운업체가 망하면, 선주에게도 부담이므로 용선료를 깎아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시도가 성공하면, 해운업체에선 숨통이 트인다. 하지만 전망은 불투명하다.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지난 15일(현지시간)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 참석 차 방문한 미국 워싱턴DC에서 기자들과 만나 현대상선을 콕 짚어 거론했다. 그는 "(현대상선의) 용선료 협상 결과가 중요한데 잘 될지 자신할 수 없다"면서 "기업구조 조정 상황이 어떤지 다시 한 번 보겠다. 구조조정을 더 미룰 수 없다"고 밝혔다.
현실과 동떨어진 정부 대책
맞는 말이다. 그런데 정부의 책임은 없나. 그건 아니다. 용선료 부담에 취약한 구조가 된 것 자체가 정부 탓이다.
1997년 IMF 외환위기가 있었다. 이듬해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강력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재벌의 문어발 경영이 위기를 불렀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재벌의 지나친 차입 경영은 분명히 문제였다. 그러나 업종의 차이를 무시한 대책은 위험했다. 당시 정부는 대기업 부채 비율 200%를 기준으로 제시했다. 해운업체는 구조적으로 부채 비율이 높기 마련이다. 자기 배를 갖고 있는 경우, 그게 온전히 자기자본인 건 아니다. 자동차 살 때 할부금융을 이용하듯, 배를 짓거나 사들일 때도 돈을 빌린다. 이런 특징은 고려되지 않았다. 해운업체 역시 부채 비율 200%를 맞춰야 했다. 결국 갖고 있던 배를 팔아서 현금을 마련했다. 남의 배를 빌려서 영업하는 구조가 더 견고해진 셈이다. 용선료 등락에 따라 영향을 크게 받는 구조다. 그 대가를 지금 치른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정책 역시 역효과만 냈다. 이명박 정부는 지난 2009년 중고선박 매입 프로그램을 운용했다. 해운업체가 갖고 있는 배를, 한국자산공사(KAMCO)를 통해 사들인 뒤 해운업체에 다시 빌려주는 프로그램이다. 당장 돈이 급한 해운업체는 이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돈을 마련할 수 있다. 한국자산공사가 외국 선주 역할을 대신 한 셈이다. 당시 한국자산공사가 배를 사들이는 값은 되도록 깎고, 해운업체에게 요구한 금리는 높게 잡았다. 한국자산공사가 포함된 공공 부문 재정 건전성 측면에선 좋은 일이지만, 기업을 지원한다는 산업 정책의 취지와는 거리가 있다. 시장주의 정부의 한계로도 볼 수 있다.
박근혜 정부 역시 비슷한 정책을 썼다.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를 산업은행이 사들였다. 해운업체의 숨통을 틔워주려는 조치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리고 다시 돈을 빌려줬는데, 기존 금리의 두 배(10~12%)를 요구했다. 해운업체의 자금난은 더 심해졌다. 지난해 말, 정부는 12억 달러(1조4000억 원) 규모의 선박펀드 조성 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해운업체 입장에선 '그림의 떡'이었다. '부채비율 400% 이하'라는 조건을 맞춰야만 이용할 수 있는 펀드였던 탓이다.
총수 일가 경영권 집착이 부실 키웠다
역대 정부의 이런 정책을 마냥 비난하긴 어렵다. 기업 총수 일가의 도덕적 해이가 심각한 탓이다. 이 문제 해결 없이 해운업체를 지원하기만 하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수 있다.
현대상선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300억 원 사재 출연과 함께 경영권 포기 선언을 했다. 현대증권 매각 등 자구 노력도 진행 중이다. 현대그룹에서 그나마 돈을 버는 기업이 현대증권이다. 알짜 계열사를 진작 팔아서 자금을 마련했어야 했는데, 그게 너무 늦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 회장이 현대증권에 집착한 만큼, 정부가 지원할 명분도 약해졌다.
경제개혁연대는 지난해 11월 논평에서 해운업체 구조조정이 지연된 가장 큰 원인으로 "지배주주의 경영권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꼽았다. 현정은 회장은 간판 계열사인 현대상선 경영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간 온갖 무리수를 뒀다. 예컨대 현대상선과 무리한 파생상품 계약을 했던 현대엘리베이터는 대규모 손실을 입었다. 이 같은 불법, 탈법 행위에 대해 제대로 감독하지 않았던 정부가 뒤늦게 구조조정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불신을 부른다는 설명이다.
현대상선은 지난해 매출 5조7000억 원 중 2조 원을 용선료로 썼다. 매출 가운데 3분의 1을 웃도는 규모다. 한진해운도 지난해 매출 7조7000억 원 중 약 1조 원을 용선료로 냈다. 올해도 약 9288억 원을 용선료로 내야 하는 한진해운은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지불해야 할 용선료가 총 2조998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용선료가 비싼 데는 이유가 있다. 이들 해운업체가 선사와 용선 계약을 맺은 시점이 2008년 금융위기 전이었다. 금융위기가 올 줄 몰랐을 때이므로, 용선 수요가 컸다. 당연히 용선료도 높았다. 선주들은 장기계약을 하면 용선료를 깎아준다고 했다. 국내 해운업체들은 장기계약을 맺었다.
금융위기 이후 물동량이 확 줄었다. 운임도 떨어졌다. 하지만 장기계약 용선료는, 금융위기 전 수준 그대로다. 국내 해운업체는 세계 무역이 활발하던 시기 용선료 '상투'를 잡은 꼴이 됐다. 높은 용선료를 내면서 빌린 배를, 낮은 운임에 화주에게 빌려주는 사업. 오래 버티기 힘든 게 당연하다.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해운업체들은 오는 5월께 선주들과 용선료 재협상을 시도할 계획이다. 해운업체가 망하면, 선주에게도 부담이므로 용선료를 깎아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시도가 성공하면, 해운업체에선 숨통이 트인다. 하지만 전망은 불투명하다.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지난 15일(현지시간)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 참석 차 방문한 미국 워싱턴DC에서 기자들과 만나 현대상선을 콕 짚어 거론했다. 그는 "(현대상선의) 용선료 협상 결과가 중요한데 잘 될지 자신할 수 없다"면서 "기업구조 조정 상황이 어떤지 다시 한 번 보겠다. 구조조정을 더 미룰 수 없다"고 밝혔다.
현실과 동떨어진 정부 대책
맞는 말이다. 그런데 정부의 책임은 없나. 그건 아니다. 용선료 부담에 취약한 구조가 된 것 자체가 정부 탓이다.
1997년 IMF 외환위기가 있었다. 이듬해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강력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재벌의 문어발 경영이 위기를 불렀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재벌의 지나친 차입 경영은 분명히 문제였다. 그러나 업종의 차이를 무시한 대책은 위험했다. 당시 정부는 대기업 부채 비율 200%를 기준으로 제시했다. 해운업체는 구조적으로 부채 비율이 높기 마련이다. 자기 배를 갖고 있는 경우, 그게 온전히 자기자본인 건 아니다. 자동차 살 때 할부금융을 이용하듯, 배를 짓거나 사들일 때도 돈을 빌린다. 이런 특징은 고려되지 않았다. 해운업체 역시 부채 비율 200%를 맞춰야 했다. 결국 갖고 있던 배를 팔아서 현금을 마련했다. 남의 배를 빌려서 영업하는 구조가 더 견고해진 셈이다. 용선료 등락에 따라 영향을 크게 받는 구조다. 그 대가를 지금 치른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정책 역시 역효과만 냈다. 이명박 정부는 지난 2009년 중고선박 매입 프로그램을 운용했다. 해운업체가 갖고 있는 배를, 한국자산공사(KAMCO)를 통해 사들인 뒤 해운업체에 다시 빌려주는 프로그램이다. 당장 돈이 급한 해운업체는 이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돈을 마련할 수 있다. 한국자산공사가 외국 선주 역할을 대신 한 셈이다. 당시 한국자산공사가 배를 사들이는 값은 되도록 깎고, 해운업체에게 요구한 금리는 높게 잡았다. 한국자산공사가 포함된 공공 부문 재정 건전성 측면에선 좋은 일이지만, 기업을 지원한다는 산업 정책의 취지와는 거리가 있다. 시장주의 정부의 한계로도 볼 수 있다.
박근혜 정부 역시 비슷한 정책을 썼다.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를 산업은행이 사들였다. 해운업체의 숨통을 틔워주려는 조치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리고 다시 돈을 빌려줬는데, 기존 금리의 두 배(10~12%)를 요구했다. 해운업체의 자금난은 더 심해졌다. 지난해 말, 정부는 12억 달러(1조4000억 원) 규모의 선박펀드 조성 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해운업체 입장에선 '그림의 떡'이었다. '부채비율 400% 이하'라는 조건을 맞춰야만 이용할 수 있는 펀드였던 탓이다.
총수 일가 경영권 집착이 부실 키웠다
역대 정부의 이런 정책을 마냥 비난하긴 어렵다. 기업 총수 일가의 도덕적 해이가 심각한 탓이다. 이 문제 해결 없이 해운업체를 지원하기만 하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수 있다.
현대상선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300억 원 사재 출연과 함께 경영권 포기 선언을 했다. 현대증권 매각 등 자구 노력도 진행 중이다. 현대그룹에서 그나마 돈을 버는 기업이 현대증권이다. 알짜 계열사를 진작 팔아서 자금을 마련했어야 했는데, 그게 너무 늦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 회장이 현대증권에 집착한 만큼, 정부가 지원할 명분도 약해졌다.
경제개혁연대는 지난해 11월 논평에서 해운업체 구조조정이 지연된 가장 큰 원인으로 "지배주주의 경영권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꼽았다. 현정은 회장은 간판 계열사인 현대상선 경영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간 온갖 무리수를 뒀다. 예컨대 현대상선과 무리한 파생상품 계약을 했던 현대엘리베이터는 대규모 손실을 입었다. 이 같은 불법, 탈법 행위에 대해 제대로 감독하지 않았던 정부가 뒤늦게 구조조정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불신을 부른다는 설명이다.
그간 한진해운은 조양호 회장의 지원으로 유지돼 왔다. 조 회장이 1조 원 가량을 지원했다. 그러나 한진그룹 핵심 계열사인 대한항공 역시 자금 사정이 나빠진 상태다. 계속 지원할 여력이 없다.
결국 조 회장은 채권단 자율협약을 하겠다고 밝혔다. 한진해운 경영권을 채권단에 넘긴다는 것이다. 발표 시점은 지난 22일이다. 그 전에 한진해운 기존 대주주 일가와 상의했을 게다. 조 회장의 제수에 해당하는 최 회장은 그 내용을 알았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데 최 회장과 그의 자녀들(조유경, 조유홍 씨)은 지난 6일부터 20일까지 보유한 한진해운 주식 전부를 팔았다. 한진해운 주식은 22일 발표 이후 폭락했다. 그걸 피하려는 조치였다고 보인다. 이는 내부 정보를 이용한 불법 행위일 수 있다. 마침 금융감독위원회가 25일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총수 일가가 회피한 손해는 결국 개미 투자자가 뒤집어쓰기 때문이다. 총수 일가가 이런 행태를 보이는 한, 정부의 지원은 명분을 얻기 힘들다.
일자리 잃어버릴 글로벌 인재들, 지금 무슨 생각할까
안타까운 건 직원들이다. 경영권을 채권단에게 넘긴다는 건, 빚을 갚는 게 경영의 최우선 목표가 된다는 뜻이다. 구조조정이 필연이다. 해운업체에는 외국어가 능하고 국제경제에 밝은 인재가 많다. 이들 상당수가 일자리를 잃을 것이며, 재취업 역시 어려울 전망이다. 거의 모든 수출 산업에서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기 때문. 해운업체 직원이 가진 전문성에 대한 수요가 줄고 있다.
일자리 잃어버릴 글로벌 인재들, 지금 무슨 생각할까
안타까운 건 직원들이다. 경영권을 채권단에게 넘긴다는 건, 빚을 갚는 게 경영의 최우선 목표가 된다는 뜻이다. 구조조정이 필연이다. 해운업체에는 외국어가 능하고 국제경제에 밝은 인재가 많다. 이들 상당수가 일자리를 잃을 것이며, 재취업 역시 어려울 전망이다. 거의 모든 수출 산업에서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기 때문. 해운업체 직원이 가진 전문성에 대한 수요가 줄고 있다.
이 와중에 경영을 망친 총수 일가는 피해를 떠넘길 궁리만 했다. 거리에 나앉을 직원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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