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만 뜨면 기득권자들의 가당찮은 ‘갑질’이 기사거리가 되고, “아프니까 청춘이다”, “청년 일자리가 없으면 중동으로 진출하라” 그 허튼소리에 비분강개한 ‘청춘’과 힘없는 ‘을’들은 억장이 무너지고 속절없이 맥이 빠진다. 이렇게 정의롭지 못한 양극화, 불평등이 심해지고, 그래서 힘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이 갈수록 버거워지고 있다. 그런 오늘 4월 23일이 세계적인 대문호 영국의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스페인의 미셀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가 1616년, 세상을 뜬지 4백주기가 되는 날이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친숙하기까지 한 위대한 셰익스피어를 능가하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근대소설의 효시(알베르 티보데), “온 세상을 뒤집어 봐도 ‘돈키호테’보다 더 지고하고 박진감 넘치는 픽션은 없다”(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그 찬사를 뛰어넘어 성서 다음으로 칠 정도의 불후의 명작이 바로 ‘돈키호테’다.
에스파니아의 전성기가 저물어가는 시기에 살았던 세르반테스의 일생은 순탄치 않았지만, 결코 좌절하여 포기하지 않고 분투하는 삶을 살았다. 젊은 시절 지원입대하여 레판토 해전에서 승리하였으나, 부상을 당해 평생토록 왼팔을 쓸 수 없게 된다. 이후에도 줄곧 이어지는 시련과 역경에 굴하지 않았고, 그 불타는 전의, 결기로 쉰 살의 적지 않은 나이인데도 옥중에서 돈키호테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라만차라는 시골에서 허송세월하던 나이 많은 이달고(몰락한 귀족) 키하노가 기사소설을 읽고 대오각성하여 편력 기사가 되어 불의와 맞서 싸우겠다는 결심을 한다. 미쳤다고 했지만, 나흘을 생각하여 그와 함께 할 말에게 일하는 말 ‘로신’, 앞이라는 뜻의 ‘안테’, 즉 으뜸가는 명마 ‘로시난테’로 명명하고, 자신의 이름은 여드레 동안이나 고심한 끝에 귀족의 칭호 ‘돈’, 갑옷의 국부보호대 ’키호테’, 출신지 ‘라만차’를 나타내는 ‘돈 키호테 데 라만차’로 지었으니 어찌 단순하게 미쳤다 할 것인가?
실은 자신의 과업목표(task goal)를 위하여 미치기로 작정하였을 것이다. 당시에 스페인의 법령은 가난하거나 미친 사람은 기사임명을 금지시켰으나 돈키호테에게는 그것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못했다. 극적으로 기사서품식을 거행한 후 당당하게 목적지를 향해 길을 떠난다. 그렇듯 돈키호테는 누가 뭐래도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신념에 따라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정의를 위하여 분투하라!” 절대선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에게는 ‘안일과 휴식은 없다’ 이 엄중한 돈키호테의 좌우명은 곧 세르반테스의 신념이기도 한 것이다. 미친 키하노, 그래서 정의의 기사 돈키호테가 된 그는 불광불급(不狂不及), 그 굳건한 의지와 불타는 열정으로 세상에 만연한 불의를 타파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는 사명의식을 다진다. 의식의 대전환을 통하여 기사보다 훨씬 더한 ‘기사도 정신’에 투철한 기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산전수전 다 겪으며 세상의 진리를 터득한 작가 세르반테스의 분신. 긴 창을 높이 치켜들고 거대한 풍차를 향하여 거침없이 돌진하는 돈키호테는 ‘정의’의 화신이다(미국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버니 샌더스를 생각케 한다. 고군분투, 전력투구하는 불굴의 노장은 창조적 도전과 신념과 의지로써 이미 ‘역사적 의미’의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부디 무운장구하기를 빈다).
“나는 행동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고향을 떠났다. 땅을 저당 잡혔다. 안락을 버리고 자신을 운명의 손에 맡긴 채 운명이 이끄는 대로 나아갈 따름이다. 나는 지금, 사라져버린 기사도를 다시 부흥시키고자 노력하며, 오랜 동안 여기서 넘어지고 저기서 쓰러지며, 이곳에서 주저앉았다가 저곳에서 다시 일어서며, 과부를 구하고 처녀를 지키며 유부녀와 고아들을 돕는다”(돈키호테)
사진 출처 오마이 뉴스
그런데, 이처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야 할 야댱인 더불어민주당의 김종인 대표가 안타깝게도 천민자본주의가 획책하는 네거티브 전략과, 이에 동조하는 정부여당을 격파하는 포지티브시스템, 즉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경제 활성화’를 생각지 못하여 국회의원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기업구조 조정’을 거론하였다. 이에 뒤질세라 국민의당의 안철수 대표가 맞장구를 치고, 정부(유호일 부총리)는 이를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화답하며, 노동개혁법안과 서비스산업발전법안을 들고 나섰다. 이를 충정으로 생각하면 다 좋은데, 김종인 대표가 전제한 바처럼 “구조조정은 고용 문제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요는 조선, 해운 등을 위시한 부실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기득권자들(해당 대기업과 노조)의 갑질이 기승을 부릴게 불 보듯 뻔하므로 하청 업체와 노동자들이 먼저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구조조정을 빙자하여 일반해고(저성과자 해고), 취업규칙 변경(요건약화)을 꾀하는 것은 ‘노동권’을 침해하는 갑질의 충동질이 분명하다. 고용불안과 저임금을 비롯한 근로조건 악화를 가져올 기간제 시한연장과 파견법도 마찬가지다.
노동자가 봉인가? 만일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면, 위정자들은 부동산, 주식 등 투기성 투자자금인 대기업의 막대한 유보금을 고용창출을 위해 투자하는 것을 생각이나 해봤는지 묻고 싶다. (원조가 영국이고 독일에서 자리 잡은) ‘경제민주화’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드는데, 유럽처럼 무엇보다 선결하여야 할 노사관계 및 조업여건 민주화, 노동자본위 복지정책, 악덕기업주 전횡방지, 노동자(대표) 기업경영 참여, 불공정거래 완절근절 등, 경제민주화의 기반구축을 위한 확실한 방책을 마련해 놓고 하는 소린가?
정부가 말하는 ‘서비스산업발전법안’도 신중하게 재검토하여야 마땅하다. 선진국에서도 경제 불평등이 야기되기 시작한 원인이 주로 제조업이 줄어들고, 역으로 서비스업이 늘어난 데 있음을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다(무분별한 서비스산업의 확대는 저숙련, 저임금 노동자의 고용 증가를 가져온다는 점을 간과치 말아야 한다).
경제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백약이 무효이고 오로지 사회정의, 특히 분배정의, 곧 최소극대화(最小極大化)의 원칙으로써 사회적 약자를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J. 롤스, ‘정의론’). 한마디로 정의실현이야 말로 만병통치약(panacea)인 것이다. 그렇게 공정하고 효율적인 경제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경제성과를 높이고 국민의 삶,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는 것이다.
정의실현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 전력투구했던 돈키호테는 세 번째 출정에서 ‘하얀 달의 기사’인 삼손 카라코스에 패하여 편력 기사의 모험, 그 긴 여정을 끝내고 귀향하여 정신을 차리고 깊은 실의에 빠진다. 돈키호테는 힘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를 돕고 불의를 쳐부수고 정의를 실현코자 분투하였으나 끝내는 좌절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코 현실에서 패퇴한 것이 아니라, 그의 피나는 노력으로 현실의 변화를 가져왔다. “남의 완력에 부득이 패배한 채 돌아오셨으나, 자기 자신에게는 승리를 거두고 오셨다” (산초)
그리하여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돈키호테를 따랐던 그의 충복이며 추종자였던 ‘산초 판사’가 바라타리아도(島)의 통치자가 되어 그를 닮고 그를 본받고 그의 가르침대로 완벽하게 나라를 다스려 유토피아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 긴 스토리(이야기)를 책을 펴 읽으면서 웃음을 금치 못했으나, 책을 덮고 곰곰이 생각하노라면 눈물이 난다.
목하, 우리나라는 다른 문제들은 차치하더라도 경기불황과 그로 인한 민생고가 극심한 지경이다. 이 총체적 난국(crisis management)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버니 샌더스나 돈키호테처럼 용감한 리더가 절실한 지금이다. 우리의 위정자 그리고 경제인들도 ‘정의’를 바로 세우는데 앞장서며, 약자를 배려하고 도덕적 의무를 다하는, 즉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실천하는 데 진력해 주길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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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April 24, 2016
정의가 바로 서야 경제가 산다 정의를 향하여 돌진하는 돈키호테, 버니 샌더스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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