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벤처 시장에 제2의 전성기가 왔다. 벤처기업으로 출발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페이스북·트위터·우버·샤오미 등이 전세계 산업계의 판도를 바꾸자 젊은 청년들이 벤처 창업 전선에 뛰어들고 있다. 한국 역시 상장 전에 대규모 자금을 조달하는 거물 벤처들이 속속 태어나고 있다. 그러나 국내·외 벤처전문가들은 우리나라 벤처 생태계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지적한다. 정부가 의욕적으로 지원을 하고 있지만, 지나친 정부개입으로 비효율과 도덕적 해이도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 벤처 생태계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편집자주]
벤처 기업을 운영하는 이영훈(가명·30대 중반)씨는 최근 중소기업청의 ‘민관 공동투자 R&D(연구개발) 협력펀드’에 지원서를 냈다. 중기청과 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이 공동으로 조성한 160억원 규모의 펀드로, 중소기업의 기술 개발에 3년 간 최대 10억원까지 지원하고 상용화가 완료될 경우 판로(販路)까지 마련해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대상 기업으로 선정될 경우 중간 진도 점검을 통과해야만 계속해서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까다로운 조건같이 보이지만 이씨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기술력에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는 “중국 중관춘(中觀村) 의 전자상가에 가면 500만원으로 그럴 듯한 시제품을 만들어올 수 있는데, 뭐하러 직접 개발해 만들겠냐”며 태연하게 웃었다.
이씨가 예상하는 R&D 비용은 약 1억원. 펀드 지원 대상자로 선정되면 정부로부터 최대 7500만원을 지원받을 수 있다. 정상적으로 기술 개발을 진행하는 대신 중국에서 500만원짜리 가짜 시제품을 만들어온다면, 7000만원을 남길 수 있는 셈이다. 3년 뒤 과제 지원 기간이 만료될 시점엔 “시제품까진 만들어봤지만 상용화엔 실패했다”고 둘러내면 그만이다.
정부의 R&D 지원금을 노린 벤처 기업가의 ‘꼼수’는 이씨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대학 교수들마저 정부 지원금을 타내는 데만 급급해 편법을 쓴다.
중기청의 한 관계자는 “대학과 중소기업 간 산학 연구에 대한 지원 사업을 할 때, 일부 기업이 해당 분야 전문가도 아닌 교수를 앞세워 신청서를 내는 경우가 있다”며 “이런 기업은 지원금을 받아도 R&D 대신 일반적인 용도로 사용했다”고 말했다.
관계기관 역시 지원 대상 기업의 기술 개발 상황을 수시로 검토하고 자금 사용처에 관한 증빙 서류도 확인했지만 작정하고 속이려는 신청자들을 모두 걸러내진 못했다.
관계기관 역시 지원 대상 기업의 기술 개발 상황을 수시로 검토하고 자금 사용처에 관한 증빙 서류도 확인했지만 작정하고 속이려는 신청자들을 모두 걸러내진 못했다.
◆ 정부 벤처 지원 예산, 지난해 총 12조원 추산
국내·외 벤처 업계 관계자들은 “현재 한국만큼 창업하기 좋은 나라가 거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창업시장에 풀린 정부 자금도 풍부하고, 벤처 지원 정책 역시 많다. 편법으로 정부 돈을 타 가는 ‘지원금 사냥꾼’이 곳곳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게 이들의 공통적인 지적이다.
중소기업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벤처·중소기업 지원 예산은 총 12조원에 달했던 것으로 추산된다. 정부의 지원 예산은 2012년 10조원, 2013년 11조원으로 점진적으로 증가해왔다.
지원 사업은 총 229건이었으며, 이 중에서 중앙정부의 중소기업 지원사업만 156개였고 공사·공단 등 관리 기관은 총 63개에 달했다. 이들 관리 기관의 소관 부처로는 중소기업청을 비롯해 산업통상자원부·미래창조과학부·금융위원회·농림축산식품부·고용노동부·환경부·문화체육관광부 등이 포함됐다.
올해와 내년 정부의 벤처·중소기업 지원 예산이 얼마나 되는지는 종합적으로 계산해내기가 쉽지 않다. 다만 주무부처인 중소기업청의 올해 본예산 규모는 7조8860억원, 내년도 본예산은 8조609억원이다. 중소기업청의 본예산이 8조원을 넘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부가 최근 발표한 2016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전국에 설치된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중심으로 한 벤처·중소기업 지원사업 규모는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창업 성장 자금을 올해 300억원에서 내년 635억원으로 늘리고 액셀러레이터 지원에 91억원을 새로 배정했다.
이 외에 창업 2~5년차 기업만을 위한 사업화 프로그램을 신설해 100억원을 배정하고 중소기업청의 팁스(TIPS) 프로그램 예산을 올해 365억원에서 425억원으로 늘리기로 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신설하거나 확대할 예정이다.
실리콘밸리 벤처생태계 전문가인 윤종영 타오스 선임 컨설턴트는 “우리나라는 1년 안에 벤처 기업 몇 개에 투자해야 한다든지 하는 ‘양 채우기’식 지원이 많은데, 그렇다보니 계약 금액이나 성과 등에 대한 내용에도 부풀리기나 왜곡이 많이 섞여있으며 일일이 확인이 다 안 되는 것이 현실”이라며 “공무원들도 이런 문제를 다 알고 있지만 대안이 없다고들 한다”고 말했다.
◆ ‘지원금 사냥꾼’에 이어 ‘브로커’까지
벤처 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금이 넘쳐나다보니 청년 창업가들을 겨냥한 ‘지원금 브로커’까지 등장하고 있다.
벤처 기업가 김경재(가명)씨는 “올 초 정부 지원금을 받게 해주겠다며 접근한 노무사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말했다.
노무사는 김씨에게 “조건만 충족한다면 정부 지원금을 받을 수 있도록 연결해주겠다”며 수수료 30만원을 선금으로 받았다. 김씨에게 돌아온 대답은 “아무래도 조건이 안 돼 지원금을 받기 어렵겠다”는 것이었다.
국내 한 액셀러레이터도 입주 기업이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을 수 있도록 알선해준 뒤 중간에서 수수료를 챙겨 논란이 된 바 있다.
입주 기업 관계자는 “월세와 회계사 자문 비용 등 한달에 약 150만원을 지불하고 있는 상황에서 추가로 지원금 수수료까지 떼어가겠다고 하니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면 입주사 입장에서는 많이 남는 장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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